기독교 역사: 기독교의 뿌리(1-5)
[2] 기독교 역사: 기독교의 뿌리(1-5)
1. 구약성서-이스라엘이야기
7) 사이러스와 추방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느부갓네살이 죽자 바빌로니아제국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곧 페르시아 사이러스에게 멸망당했다. 사이러스는 포로로 잡혀와 있는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대부분 유대인들은 이미 페르시아에 정착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남아 있으려 했기에, 약 50,000명의 유대인들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기원전 539년).
추방됐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오직 낙심 뿐이었다. 성전과 도시의 성곽은 다시 지어야만 했고, 끊임없이 외적에게 위협을 받았고, 수중에 가진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절망에 지친 사람들은 다시금 선조들이 걸었던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즉, 율법을 버리고 이방의 종교를 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페르시아 왕 아르타세르크1세의 술 따르는 시종이었던 느헤미아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고는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다. 느헤미아는 수개월 동안 금식하여 기도한 후 아르타세르크 왕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왕은 느헤미아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왕의 대사로서의 전권을 부여하였다. 느헤미아는 대단히 능력있는 행정가였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 곧 성전과 시의 성곽을 재건축했다. 예루살렘 성곽은 52일만에 다시 쌓아 올려졌다. 후에 느헤미아는 사제 이즈라와 함께 영적 개혁과 부흥운동의 불을 붙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에즈라를 유대교의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다. 토라에 대한 그의 글들과 국가 재건을 위한 투쟁, 그리고 성전을 재건축하려고 했을 때 아르타세르크왕이 그에게 보내 준 신임 등은 모두 에즈라가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8) 새로운 유대교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이 다시 통일국가로 재건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유다는 코엘-시리아의 속국이 된 채 시리아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정복과 망명의 시기가 히브리 문화와 종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유대교는 대부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부터 회당(synagogue)은 '잠정적으로' 예배장소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사실상 자신의 국민성을 나타내 줄 만한 모든 것을 상실하고 나자, 토라를 수집하고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사제집단은 선택받은 지위를 누렸고, 유대인들과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독특한 제의와 율법이 강조되고 세련되어 감에 따라 분리의식도 점점 깊어져 갔다.
바빌론 포로기 동안에는 아람어(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의 일상언어)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아람어는 당시 중동 교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였다. 바빌론에 있는 동안 유대인들은 이 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했다. 기원전 300년경 유대교 라비들은 아람어로 성서주해서를 썼으며, 예배는 전통적인 히브리어와 보다 널리 이해될 수 있는 아람어 둘 다로 진행되었다.
유대역사에서 이 시기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가 소멸될 수도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으며 그들의 신학은 보다 원숙해졌다. 어떤 학자는 망명 전 이스라엘인들은 좀처럼 우상 숭배를 근절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그러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유대인들은 보다 단합되었으며, 이전보다 훨씬 강한 민족이 되었다.
출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 역사
[2] 기독교 역사: 기독교의 뿌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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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기독교의 뿌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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